
428행—438행.

트로이가 있던 프리기아(소아시아에 있는 지방) 땅
맞은편에 비스토네스족(트라키아 지방에 살던
부족)이 살던 나라가 있었다. 그곳에
폴리메스토르(트라키아 왕으로 프리아모스의 딸
일리오네의 남편)의 부유한 궁전이 있었는데,
폴리도로스(프리아모스와 헤카베의 막내 아들)여,
그대의 아버지(프리아모스)는 그대를
프리기아(트로이)의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폴리메스토르에게 몰래 맡겼소. 그것은 현명한
계획이었소. 범죄의 대가가 될 수도 있고
탐욕스러운 마음에는 유혹이 될 수도 있는 큰
재물을 그대와 함께 보내지 않았더라면 말이오.
프리기아인들의 행운이 기울자 트라키아인들의
불경한 왕은 칼을 빼어 자신의 양자 폴리도로스의
목구멍을 찔렀다. 그러고는 피해자의 육신이
없어지면 범죄도 없어지는 양 시신을 절벽에서
파도 아래로 내던졌다.
439행—449행.

아트레우스의 아들(아가멤논. 그리스 연합군
총지휘관)은 바다가 잔잔해지고
바람이 더 우호적으로 바뀔 때까지
트라키아(역사적, 지리적으로 발칸반도의
남동쪽을 부르는 지명)의 해안에 함대를
정박시켰다. 그곳에서 갑자기 땅이 쩍 갈라지더니
아킬레스가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거대한 모습으로 솟아올랐다.
그(아킬레스)는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고, 손에
칼을 들고 부당한 아가멤논에게 거칠게 대들던
때의 얼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키비족(그리스인들. 특히 트로이에서 싸운
그리스인들)이여, 그대들은 나(아킬레스)를 잊고
떠나가는구려, 내 용기에 감사하는 마음은
나와 함께 묻어버리고! 그럴 수는 없지요.
내 무덤에 적절한 명예가 빠지지 않도록
폴릭세네(아킬레스를 죽음으로 이끈 프리아모스의
막내딸)를 제물로 바쳐
아킬레스의 망령을 달래시오!" 그의 말에 전우들은
무자비한 그림자(망령)가 시키는 대로 했다.
450행—475행.

용감하고 불행한 소녀는 어머니에게 거의 유일한
위안이었건만 어머니의 품에서 낚아채어져
여자 이상으로 당당하게 무덤으로 끌려가
무자비한 화장용 장작더미가 쌓인 곳에 제물로
쓰러졌다. 무자비한 제단 앞으로 끌려간 그녀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의식이 준비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차분하고 침착했다.
그녀는 네오프톨레모스(아킬레스의 아들)가
칼을 들고 서서 자기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이제 고귀한 피를 쓰도록 하시오! (나는 준비가
다 되었소.) 그대는 내 목이나 가슴에다 그대의
무기를 묻으시오."
(그리고 그녀는 목과 가슴을 동시에 드러냈다.)
"알아두시오. 나 폴릭세네는 누구의 종노릇도
하고 싶지 않고 이따위 의식으로 그대들은
어떤 신도 달랠 수 없을 것이오.
내 죽음을 어머니께서 몰랐으면 하는 것이
내 유일한 소망이오. 어머니가 마음에 걸려,
죽는 기쁨이 감소되니 말이오. 어머니께서는
내가 죽는 것을 슬퍼하실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살아 계시는 것을 슬퍼하실 것이오. 내 요구가
정당하다면, 내가 자유민으로서
스틱스(지상과 저승의 경계를 이루는 강)의
망령들에게 갈 수 있도록 그대들은 뒤로 물러서고,
남자의 손이 내 처녀의 몸에 닿지 않게 하시오!
그대들이 나를 죽여 달래려고 하는 자가 누구든
그도 자유민의 피가 더 반가울 거요.
내 마지막 말이 그대들 가운데 누군가를
감동시킨다면
(그대들에게 간청하는 것은 프리아모스의 딸이지
여자 포로가 아니오.)
그대들은 내 어머니에게 몸값을 받지 않고
내 시신을 돌려주어, 어머니께서 매장의
슬픈 특권을 황금이 아니라 눈물로 사게 해주시오.
어머니께서는 그것이 가능할 때는 황금을 주고
사기도 했지요."84 이렇게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눈물을 참고 있었으나, 백성들은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475행—482행.

사제도 눈물을 흘리며 마지못해,
그녀가 앞으로 내민 가슴을 칼로 깊숙이 찔렀다.
그녀는 무릎이 말을 안 들어 땅에 쓰러지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두려움을 모르는 대담한 얼굴
표정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녀는 쓰러지고 나서도
가려야 할 부분을 옷으로 가리고, 정숙과 품위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그녀를 들어올렸고, 자신들이 애도한,
프리아모스의 자녀들을 일일이 세며 한 집안에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회고했다.
483행—500행.

그들은, 소녀여, 그대를 위하여, 그리고 얼마
전까지도 왕비라고, 왕자들의 어머니라고 불렸고
번영하는 아시아(소아시아)의
정수였으나 지금은 포로치고도 가혹한 운명을
겪고 있으며, 헥토르(트로이 제일의 맹장)를 낳지
않았더라면 승리자 오디세우스(그리스 이오니아
해에 있는 섬의 군주)도 원치 않았을
그대(트로이의 왕비 헤카베)를 위해 슬퍼하고
있는 것이오. 그렇다면 헥토르가 자기 어머니를
위해 간신히 주인을 찾아낸 셈이다.
그녀는 그토록 용감한 혼이 떠나고 없는 시신을
껴안고는 그토록 자주 조국과 아들들과 남편을
위해 흘리던 눈물을 딸을 위해서도 흘렸다.
그녀는 딸의 상처에 눈물을 쏟으며 딸의 입에
입맞추었고, 매질에 익숙해진 자신의 가슴을 쳤다.
그러고는 피가 엉겨붙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가슴을 찢으며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며
이런 말을 했다. "내 딸아, 이 어미의 마지막
(내게 남은게 뭐란 말인가?) 슬픔이여, 내 딸아,
너는 누워 있고, 나는 내 것이기도 한 네 상처를
보고 있구나! 보라, 내 자식들 중 아무도 살해되지
않고 죽는 일이 없도록 너마저 부상을 당했구나.
나는 네가 여자라서 칼로부터 안전할 줄 알았더니,
여자임에도 칼에 쓰러졌구나. 트로이를
파괴하고 나를 자식 없는 어미로 만든
아킬레스가, 그토록 많던 네 오라비들을 죽인
바로 그자가 너마저 죽였구나!
501행—526행.

그자(아킬레스)가 파리스(트로이의 왕자)와
포이부스(태양의 신 아폴로의 별칭)의
화살에 쓰러지고 난 뒤에 나는 ‘이제는 분명
아킬레스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지.' 싶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두려워해야 했다.
매장된 그의 유골이 우리 집안을 향해 미쳐
날뛰고 있고, 무덤에 들었어도 그자를 우리는
적으로 느꼈으니 말이다. 내가 자식들을 많이
낳은 것은 아이아코스의 손자(아킬레스)를
위해서였다. 거대한
일리온(일리온은 일리온의 건설자 ‘일로스’ 왕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설한 왕국의 이름이다.
‘일로스’의 아버지 ‘트로스’의 이름에 따라
’트로이‘라고도 불렸다)은 쓰러져 누워 있고,
백성의 재앙은 비극적인 종말로 끝났지만,
그래도 아무튼 끝났다. 오직 나에게만
페르가마(트로이의 성채)는 아직도 살아남고,
내 괴로움은 계속해서 이어지는구나!
얼마 전만 해도 나는 그토록 많은 사위와 아들과
며느리와 남편의 힘을 업고 나라에서 제일가는
여자였는데 지금은 무일푼의 추방자로서 가족들의
무덤을 뒤로하고 페넬로페(오디세우스의 아내)의
전리품으로 끌려가는구나! 페넬로페는 할당된
양털실을 잣고 있는 나를 가리키며
이타카(오디세우스가 왕으로 있는 섬)의
여인들에게 말하겠지. '이 여자가 헥토르의
유명한 어머니이자 프리아모스의 아내이다.'
그토록 많은 자식을 잃은 뒤 네 어미의 괴로움을
위로하도록 남겨진 너마저 이제 적의 무덤에
제물로 바쳐졌구나! 나는
죽은 적(아킬레스)에게 바칠 제물을 낳은 거야.
왜 나는 이렇게 모질게도 살아 있지?
왜 나는 머뭇거리지? 비참한 노령이여, 나를 왜
살려두는 것이냐? 잔인한 신들이시여, 어떤
새로운 재앙을 더 보게 하려고 이 노파의 수명을
늘리시는 거예요? 페르가마(트로이의 성채)가
허물어졌을 때 프리아모스가 행복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느냐?
그이는 죽었기에 행복하지. 내 딸아, 그이는
이렇게 죽어 누워 있는 너를 볼 필요 없이
목숨과 왕국을 동시에 뒤로하고 떠났으니까.
너는 공주이니까, 생각건대, 너에게는 장례식이
지참금으로 주어지고, 네 시신은 조상의 무덤에
묻히겠지. 하지만 집안의 형편이 그렇지 못하구나.
너에게는 장례 선물로 이 어미의 눈물과
낯선 해안의 모래 한줌이 주어지겠지.
527행—551행.

우리는 모든 걸 다 잃었다. 하지만 아직도 한 가지
희망이 남아 있고, 나는 그 때문에 잠시나마 살기를
원하는 거야. 이 어미의 귀염둥이이자 지금은
하나뿐인 자식이지만 전에는 내 아들들 가운데
막내였던 폴리도로스 말이야. 그애는 이 해안으로
이스마루스(트라키아 지방의 도시이자 산으로
헤브루스 강 하구의 서쪽에 있다. 여기서
이스마루스는 흔히 ‘트라키아’라는 뜻이다)
왕(폴리메스토르)에게 맡겨졌지. 한데 왜 나는
그사이 네 잔인한 상처와 무자비하게도 피가
끼얹어진 얼굴을 물로 닦아주기를 미루고
있는 거지?"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노파의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바닷가로 가며 백발을
쥐어뜯었다. 불행한 여인은 "트로이의
여인들이여, 항아리를 하나 갖다다오!"라고
말했으니, 맑은 바닷물을 퍼 담으려는 것이었다.
그때 그녀는 바닷가로 떠밀려온 폴리도로스의
시신과, 트라키아의 무기에 난자당해 쩍 벌어진
상처들을 보았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비명을
질렀으나 그녀는 괴로움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괴로움이 목소리와 눈물을 삼켜버렸던
것이다. 눈물은 안으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단단한 바위처럼 꼼짝 않고 서서 앞쪽의 땅바닥에다
시선을 고정하더니 이따금 하늘을 향해 무서운
얼굴을 들었다. 그러고는 거기 누워 있는 아들의
얼굴을 보기도 하고 상처를 보기도 했는데, 특히
상처를 유심히 보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을
분노로 단단히 무장했다. 분노가 활활 타오르자
그녀는 자기가 아직도 왕비인 양 복수하기로
결심하고는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 마치 암사자가 젖먹이
새끼를 빼앗기면 미쳐 날뛰며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의 발자국을 찾아내 뒤쫓듯이, 꼭 그처럼
헤카베는 분노와 괴로움을 뒤섞으며 자신의
나이는 잊되 결심은 잊지 않고 끔찍한 살인의
장본인인 폴리메스토르를 찾아가 대담을 청했다.
552행—575행.

그녀는, 폴리메스토르가 자기 아들에게
건네줄 수 있도록, 자기가 몰래 숨겨두고온 황금이
있는 곳을 그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오드리사이족(트라키아의 왕 폴리메스토르.
트라키아의 헤브루스 강가에 살던 부족으로
여기서는 폴리메스토르라는 뜻이다)은
그녀의 말을 믿고늘 그랬듯이 전리품에 대한
탐옥에 이끌려 은밀한 장소로 갔다.
그는 상냥한 표정으로 말했다. “헤카베여,
지체 말고 아들에게 줄 선물을 내게 주시오.
하늘의 신들께 맹세코, 그대가 지금 주시는 것과
전에 주신 것은 모두 그의 것이 될 것이오."
그가 말하며 거짓 맹세를 하는 동안 그녀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분노가
끓어넘치자, 그녀는 포로가 된 여인들을 부르며
그를 붙잡더니 배신자의 두 눈에 손가락을
쑤셔넣어 눈구멍에서 눈알을 빼냈다.
(분노가 그녀를 그토록 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두 손을 집어넣어 죄지은 자의 피에
더럽혀진 채, 눈이 아니라
(눈은 남아 있지 않았다.) 눈이 있던 곳을 뜯어냈다.
그러자 트라키아인들의 부족이 자신들의 왕의
재앙에 격분하여 무기와 돌을 던지며 트로이의
여인(헤카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납게 짖어대며 그들이 던져대는 돌들을
덥석 물었고, 입을 벌려 말할 채비를 했으나
말하려고 하면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니라 개 짖는 소리였다. 그 장소는 아직도
남아 있고, 이 사건에서 이름을 따왔다.
(그곳의 지명은 키노스세마는 ‘개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그 뒤 그녀는 지난날의 불행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여전히 슬피 짖어대며
시토니이족(트라키아 지방에 살던 부족으로,
여기서 ‘시토니아족의’는 ‘트라키아의’라는
뜻이다)의 들판을 돌아다녔다.
그녀의 슬픈 운명은 트로이인들과, 그녀의 적인
펠라스기족(고대 그리스의 선주민 부족 가운데
하나로 흔히 여기서처럼 ‘그리스인들‘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과, 모든 신도 움직였다.
그리하여 모든 신이, 심지어 유피테르(제우스)의
아내이자 누이인 유노(헤라)마저
(여신 헤라와 여신 아테나는 그리스 편이었다)
헤카베가 그런 종말을 맞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
[참고. 트라키아 지역의 헤브루스 강]

[참고. 트라키아 지역과 트로이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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